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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휘봉이 들려주는 브람스

<다른 지휘봉이 들려주는 브람스>
리카르도 샤이와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대립하는 지향

지난 몇 년간, 리카르도 샤이와 크리스티안 틸레만은 관현악 레퍼투아의 정수를 향한 보이지 않는 전투를 해왔다. 두 지휘자는 현저하게 다른 지휘 방식을 추구한다. 두 지휘자 모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들과 일함에도 불구하고, 상충하는 방식으로 전통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현재 업계에서 들리는 이야기들이 틀렸다는 듯, 두 지휘자의 녹음이 담긴 음반들은 주요 음반사에 의해 호화롭게 출시되고 있다.

2011년 베토벤 연주가 그 시작이었다. 게반트하우스오케스터 라이프치히와 함께한 샤이의 음반은 "역사적 근거에 의한 연주(역: 시대연주와 같은 의미)" 운동을 현대 관현악단으로 옮겨, 빨라진 속도에서도 호전적인 남성성은 유지하였다. 반면 이후 같은 해 발매된 비이너 필하모니커와 틸레만의 세트는 반동적으로 들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카를 뵘의 접근법을 되살리고자 한 노력은 그들의 오래된 녹음들만큼 흥미롭지도, 오랜 시간 견디지도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두 지휘자들의 관심사는 브람스를 향했다. 샤이는 다시 라이프치히 군단과 함께했고, 틸레만은 그가 새로운 상임으로 부임한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을 진두지휘했다. 두 악단 모두 이 작곡가의 음악에 대해서는 선망할 만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브람스는 직접 게반트하우스와 함께 그의 처음 세 교향곡을 지휘하였고, 바이올린 협주곡과 독일 레퀴엠의 초연을 함께했다. 드레스덴에서 브람스는 직접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 교향곡 제4번을 지휘했다.

이 두 전집은, 이 악단들의 재능에 걸맞는 평판을 누리지 못하는 미국에서는 특히, 투자할 의지만 있다면 즐거운 감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두 레이블 모두를 소유하고 있는 유니버설 뮤직 그룹이 이전 동독 영토의 7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 악단의 연주를 서로 1년의 간격도 채 두지 않고 발매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모든 것은 역사에 대한 논란이 중심이지만, 이번에는 그보다는 덜 극적이다. 베토벤에서는 상당한 분열이 남아있다. 현대 관현악 연주를 위해, 샤이, 사이먼 래틀과 파보 예르비 같은 지휘자들은 노링턴과 같은 시대연주 지휘자들에게서 많은 부분 빌려와 그 당시 베토벤의 관중이 어떻게 들었을까에 관한 가르침을 적용했다. 아직은 여태까지의 습관에 저항하는 사람들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사실 상승세를 이어가는 쪽은 이들이다. 베토벤 연주에서 오직 하나의 계보만이 있었을 것이라는 발상은 지나친 단순화임에도 불구하고, 틸레만이나 다니엘 바렌보임처럼 의식적으로 전통을 따르는 지휘자들은 약세를 보여왔다. 만약 현재의 베토벤이 어떻게 들릴지를 정리하면, 그게 좋든 나쁘든 간에, 가볍고, 빠르고, 더 톡 쏘는 느낌이라 할 수 있다.

브람스에서 그 간극은 그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한 이유로, 초기의 브람스 연주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창기 단계이다. 시대연주 악단들은 최근에서야 브람스의 작품들을 정기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와 존 엘리엇 가디너의 최신 베토벤과 브람스 녹음들을 증거로, 시대연주 브람스는 시대연주 베토벤보다도 훨씬 그 이후의 연주들과 가깝게 들린다는 것은 자명하다. 옛 연주라는 충격은 그에 따라 약해진다.

왜냐고? 베토벤 1번(1800)과 브람스 1번의 초연(1876) 사이에, 관현악 연주의 지평은 달라졌다.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의 혁신 이후로, 지휘자의 역할은 더욱 강조되었으며 그들은 적극적으로 해석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콜롬비아 대학의 음악학자 월터 프리쉬가 <브람스 연주>에서 쓴 바와 같이, "브람스 교향곡을 연주하는 데 있어 단 하나의 권위 있는 진정한 방식"은 결코 없었다.

처음부터, 브람스 지휘에 있어서 최소한 두 가지 악파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877년 빈에서 교향곡 제2번을 초연한 한스 리히터에 의해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그리고 현재 리카르도 샤이로 전해진다. 템포는 단도직입적이고 설계는 절제되어, 이 방식은 날렵하고 고전주의적으로 들린다. 한스 리히터와 마찬가지로 브람스와 바그너 모두에 정통한, 한스 폰 뷜로가 이끈 다른 경로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와 헤르만 아벤드로스로 이어졌다. 이 방식은 바그너의 미학에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매우 유연한 템포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접근법을 취한다. 비록 선배들만큼 과격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틸레만은 이 악파에 속한다. 브람스는 다른 관점들도 흠모하였으나, 본인이 직접 지휘할 때는 이 방법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스타 지휘자 두 명이 이끄는 두 가지 접근은 유니버설에게 있어 두 음반의 출시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한다면, 둘 중 어느 세트를 내가 추천할 것인가? 나는 일반적으로, 특히 실황에서는 분명히, 뷜로의 계보를 선호하므로, 틸레만 연주들을 더 즐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라이프치히의 해석이 드레스덴보다 더 몰입감이 있으며 더 일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샤이의 지휘 하에, 게반트하우스는 긴급하게 들리며, 가벼운 텍스처들은 선명히 녹음된 소리로 브람스 교향곡 내부의 복잡성을 낱낱이 드러낸다. 말랑말랑하고 호사스러운 브람스는 아니며, 연주에는 거칠고 신랄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은 3번과 4번에서 느껴지는 울화와 좌절감을 고양시킬 뿐이다. 샤이의 재빠른 템포 덕택에 2번은 결코 답답하게 들리지 않고, 1번도 꽤나 충분히 유연하다. 두 전집들 모두 <대학축전 서곡>과 <비극적 서곡>이 포함되어 있지만, 샤이의 전집에는 <사랑의 노래> 왈츠, <하이든 변주곡>, <헝가리 무곡> 일부, 교향곡 제1번 2악장의 초판도 같이 들어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리사 바티아슈빌리가 참여한 협주곡 영상들이 포함된 드레스덴의 녹음에도 칭찬거리는 많다. 특히,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은 매우 뛰어난 깊이와 소리의 중후함을 지녔다. 그리하여, 곡 특유의 승리감을 웅장함으로 에워쌀 기세인 1번과 활활 타오르는 뛰어난 4번 연주에 특별한 강점이 있다. 그의 최고 연주들에서, 틸레만은 모든 것이 제대로 딱 알맞게 들리도록 만드는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젬퍼오퍼에서 촬영된 이 연주들이 실황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을 받는다. 틸레만의 광활한 템포는 긴장감이 유지되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을 테지만, 2번과 3번에서는 창조를 목도했을 때의 전율감 없이 늘어진다. 콘서트 홀에서는 황홀했을지 몰라도, 틸레만이 장엄함을 목표로 했던 것은 지금 내게는 결국 거창하게만 들릴 뿐이다.

David All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