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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ings

쿠를랸츠키: 음변조

드미트리 쿠를랸츠키 Dmitri Kourliandski

소프라노와 앙상블을 위한 <가장 깊은 곳의 사람> Innermost Man (2002)
앙상블을 위한 <음각> Contra-Relief (2005)
목소리와 앙상블을 위한 <같음의 네 가지 상태> Four States of Same (2005)
앙상블을 위한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 Life and Death of Ivan Ilich (2005)
앙상블과 테이프를 위한 <음변조> Negative Modulations (2006)

마리아 불가코바, 소프라노 · 모스크바 현대음악 앙상블, 지휘: 알렉세이 비노그라도프
앙상블 콩트르샹, 지휘: 베아트 푸러
보리스 필라노프스키, 목소리 · 앙상블 2e2m, 지휘: 피에르 룰리에
클랑포룸 빈, 지휘: 유르연 헴펄
아카데미아 라 스칼라, 지휘: 조르지오 베르나스코니

WWE 20426

이제껏 쿠를랸츠키의 모든 녹음은 러시아의 인디 음반사 팬시뮤직으로 발매되어 왔는데, 이 디지털 앨범은 기존 네 작품들 사이에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을 추가 수록하여 콜 레뇨에서 재발매한 것이다.

첫 트랙에 실린 '가장 깊은 곳의 사람'은 짧은 프로그램 노트를 읽어보고 나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음악적 재료들이 처음에는 차례로 등장하다가, 곡이 진행될수록 겹쳐지고 서로를 관통하고, 끊겨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이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반면 두 번째 트랙 '음각'은 다소 난해하게 다가왔다. 순음악적으로는 재미있는 점이 많았으나, 음악으로 재구성된 미술로서, 제대로 본 적조차 없는 조각품과의 연관을 상상하며 듣는 것은 내게는 힘든 일이었다. 유독 이 작품에만 박수 소리(휘파람 소리까지)가 같이 녹음되어 있는데, 음악과 하나로 연속된 것처럼 들렸다. 어쩌면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 싶다.

구체음악에 가까운 테이프 녹음을 포함한, 다분히 그래픽 묘사적인 분위기의 '음변조'의 음악적 요소들은 매우 재기발랄하고 화려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톨스토이의 유명한 중편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에서는 다양한 소리 재료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가운데 독특한 극적 전개를 만들어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이 작품은 미시적인 레벨에서의 복잡한 변화와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리듬을 통해 결국은 삶과 죽음은 양면과 같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음악적 시도도 진정한 의미의 '전위'이기는 힘든 시대에, 가장 과격하고 비일상적인 소리를 묶어 재구성한 이 음반은 현대 예술음악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각 작품마다 뚜렷한 개성과 그를 한데 묶어주는 일관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컴필레이션에 가까운 앨범이지만 구성 또한 만족스럽다.

여담. 디지털 전용이라서 그런지 부클릿이 영 허술하다. 그리고 태그에 오자가 있는 것이 작은 흠. 아마존 혹은 아이튠스에서 사면 태그 문제는 없을 듯.